
화장품 원료 개발실의 불은 꺼질 줄 모른다. 최근 K-뷰티 시장의 화두는 단연 '로컬 헤리티지(지역 특산 원료)'다. 엔드유저의 요청으로 검은콩 중 청자 5호를 어렵게 공수해, 수개월간 밤을 새우며 최적의 추출 공법을 연구했다. 일반 노란 콩보다 항산화 성분인 안토시아닌과 폴리페놀 함량이 월등히 높다는 데이터까지 확보했을 땐 마침내 차별화된 독자 원료를 완성했다는 희열에 휩싸였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원료 개발자가 맞닥뜨리는 진짜 장벽은 실험실 밖, '성분 등록' 단계에서 시작된다.
국내 유통을 위해 대한화장품협회에 국문 성분명을 신청할 때는 순조롭다. 우리나라는 유전자원 보호와 마케팅적 가치를 인정해 주기 때문에 '검정콩추출물'이라는 이름으로 차별화된 성분 코드를 손에 쥘 수 있다. 문제는 글로벌 시장 진출을 위해 미국 화장품협회(PCPC)에 국제 화장품 성분 명칭(INCI)을 등록하려는 순간 터져 나온다.
PCPC의 시각은 냉정하다. 그들에게 약콩이나 서리태는 그저 대두, 즉 '돌콩(Glycine Max)'이라는 하나의 종에서 나온 흔한 변이 품종일 뿐이다. 아무리 밤을 새워 유효 성분의 차이를 증명하는 시험 성적서를 첨부하고 읍소해 봐도, 돌아오는 영문 명칭은 냉정하게도 일반 노란 콩과 완전히 똑같은 Glycine Max (Soybean) Seed Extract다.
이 지점에서 원료 개발자의 깊은 괴로움과 딜레마가 시작된다.
수개월간 쏟아부은 연구원들의 땀방울과 약콩만의 독자적인 효능이 국제 표준이라는 이름 아래 '흔하디흔한 Soybean'으로 묶여 증발해 버리는 듯한 서글픔을 느낀다. 당장 해외 바이어들에게 원료를 수출하려 해도 "성분명이 일반 콩이랑 똑같은데 왜 이 돈을 주고 사야 하느냐"는 단가 압박과 기술 경시 섞인 질문을 마주하기 일쑤다. 브랜드사 마케터들로부터 "해외 수출용 전성분 표기에는 차별화가 안 되는데 마케팅을 어떻게 하냐"는 원망 어린 시선을 견뎌내는 것 또한 온전히 개발자의 몫이다.
결국 국내 제품에는 '약콩추출물'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도, 해외 수출용 용기에는 쓰라린 마음을 삼키며 'Soybean Extract'로 표기해야 하는 이원화 작업의 번거로움이 매번 반복된다.
K-뷰티 원료가 세계 무대에서 제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현지 식물에 대한 깊은 이해와 미세한 효능적 차이를 반영할 수 있는 글로벌 성분 등록 기준의 유연성이 절실하다는 것이 오늘도 실험실에서 콩과 사투를 벌이는 원료 개발자들의 숨은 한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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